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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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6 12.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가 사라진 날이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문중 분들의 결정이 내려졌다고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나는 그저 결과를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은 눈을 뜨기도 전부터, 조용히 두 분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는 나를 참 예뻐해 주셨다. 아버지는 일곱 형제 중 여섯째, 막내아들이셨는데, 그 아들이 낳은 아이가 나였기에 더 애틋하게 바라봐 주셨던 것 같다. 엄마에게 혼나던 날이면 도망쳐서 할머니 품에 안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 덕분에 집에 돌아오면 더 혼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돌아가셨다. 아직도 기억난다. 유난히 쌀쌀했던 어느 추석날 새벽, 손님 맞을 준비를 하시느라 찬물에 머리를 감으시다 쓰러지셨고, 그렇게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엘리트셨다. 사범대를 나오셔서 국어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시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어학회에 친구분들도 많이 계셨다고 들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며 하루아침에 교단에서 내려와야 했고, 그 억울함과 상실감 속에 술을 드시다 결국 메틸알코올로 인해 실명하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이 되어드린 적이 있었다. 보고 싶은 책을 읽어드리고, 한문책은 손바닥에 글자를 한 자씩 적어드렸고, 가시고 싶은 곳을 손을 잡고 모셔다 드리기도 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 그 토요일, 온 가족이 함께였는데 나만 서울에 홀로 있었다. 그날 밤, 죄책감을 안고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원주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염을 돕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이 사라져 가면서 그 기억마저 사라지면 결국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란 사실과 현실을 이번에 다시 절실히 느꼈다.

 

두 분의 산소는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때때로 아버지와 함께 들르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가끔은 아버지 혼자 다녀오셔서 부모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제 그곳도, 두 분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셨던 공간도 영원히 사라졌다. 두 분은 이제 완전히 세상의 한 조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잊힌다는 것에 가슴 먹먹한 해졌고, 그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얼마나 허전하실까. 이따 전화 한 번 드려야겠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한 안부로 말이다.

 

나도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가끔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리고 그분들이 조용히 누워계시던 그곳이, 그 곳에 아버지와 같이 가던 모습이 생각나겠지?

 

 

 

https://youtu.be/NF89gdE5Z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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